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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모리 후사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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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모리 후사키치는 일본의 지진학자이자 지진 공학의 선구자로, "일본 지진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1868년 후쿠이현에서 태어나 도쿄 제국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기상학과 지진학을 연구했다. 1890년 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존 밀른의 지도 아래 노비 지진의 여진을 연구하여 오모리 공식을 발표했다. 그는 세계 최초의 연속 기록 가능한 지진계인 오모리식 지진계를 개발했으며, 사쿠라지마 대분화 당시 주민들에게 경고하여 인명 피해를 줄이는 데 기여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지진을 연구하고 캘리포니아에 지진계를 설치하는 등 지진 연구와 재해 예방에 크게 기여했으며, 1923년 관동 대지진 발생 중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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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모리 후사키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모리 후사키치
이름오모리 후사키치
로마자 표기Ōmori Fusakichi
출생1868년 10월 30일
출생지후쿠이 현, 에치젠 국
사망1923년 11월 8일
사망지도쿄 도
국적일본
학력
모교도쿄 제국대학
경력
직업과학자, 지진학
근무 기관도쿄 제국대학
알려진 업적지진학 개척
수상
수상일본 황실, 서보장

2. 생애 및 경력

1894년부터 3년간 유럽으로 유학을 갔다. 1896년 유럽 유학에서 귀국 후, 제국대학 지진학 교수가 되었다.[41] 노비 지진을 계기로 문부성(현 문부과학성) 내에 설치된 진재 예방 조사회의 간사를 오랫동안 맡아, 일본 지진학의 지도적인 입장에 있었으며, "일본 지진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1898년 세계 최초의 연속 기록 가능 지진계인 오모리식 지진계를 개발했다. 1899년 초기 미동 지속 시간으로부터 진원까지의 거리를 결정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진원 거리의) 오모리 공식을 발표했다.

1905년 같은 강좌의 조교였던 이마무라 아키쓰네가 향후 50년 이내에 도쿄에서 대지진이 발생할 것을 경고하고 대책을 촉구하는 기사를 잡지 『태양』에 기고하여 사회 문제가 되었다. 후사키치는 지진 대책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를 보였지만, 사회에 혼란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마무라의 주장을 근거 없는 설로 물리치는 입장을 취했다.

1910년 우수산 분화 때, 자신이 시제품한 지진계를 소베츠정에 설치하여 화산성 지진을 상세 관측했다.[42] 이 관측으로 화산성 미동을 세계 최초로 기록하는 등 기존 화산학에 새로운 지견을 가져왔다.[42] 1911년 "대분화의 예지는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라고 언급,[42] 분화 예지를 위한 화산 관측소 설치를 제언하고,[42] 우수산 논문을 발표했다.[42]

1914년 1월 12일 사쿠라지마 다이쇼 대분화 발생 직전, 작은 지진이 다발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주의를 촉구하는 전보를 치려 했다.[43] 1월 16일 해상에서 사쿠라지마를 시찰하고, 가고시마 시내에는 위험이 없다는 견해를 발표하여 혼란 상태에 있던 시내를 평정시켰다. 같은 해 노벨상 물리학 위원회로부터 논문 제출 의뢰서를 받았으나 논문은 제출하지 않았다.[44]

1923년 범태평양 학술 회의 참석차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던 중 관동 대지진이 발생했다. 시드니의 리버뷰 천문대에서 지진이 지진계에 기록된 것을 확인하고 귀국길에 올랐으나, 호주 체류 중 뇌종양이 악화되어 귀국 직후 도쿄 대학 병원에 입원, 한 달 후 사망했다.[44] 묘소는 다마 영원에 있다.

2. 1. 초기 생애

1868년 에치젠국 아스와군 후쿠이성(현 후쿠이현 후쿠이시 테요2초)에서 하급 무사 오모리 후사키치의 다섯째 아들로 신야시키 100칸 나가야에서 태어났다.[39] 8명의 형제가 있었고 집은 가난했다.[39] 창립된 지 얼마 안 된 아사히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3학년 때 가족과 함께 상경했다.[39]

1877년 관립 사카모토 학교(현 주오구립 사카모토 초등학교) 5급생(4학년)으로 전입했고, 1881년 공립학교(현 가이세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883년 도쿄 대학 예비 문학부에 입학, 1887년 제국대학 이과대학 (현 도쿄 대학 이학부)에 입학하여 물리학을 전공했다.

1890년제국대학 이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40] 대학원에서 기상학지진학을 전공했다. 영국에서 초빙된 지진학자 존 밀른의 지도 아래 1891년에 발생한 노비 지진의 여진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도쿄 제국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초기 영국의 외국인 고문들과 함께 물리학을 공부했으며, 특히 1895년 일본을 떠날 때까지 존 밀른에게, 그리고 1880년 도쿄 제국대학 최초의 지진학 교수가 된 세키야 세이케이를 포함한 일본인 동료들에게 배웠다.[1] 1894년에는 본진으로부터의 경과 시간에 따른 여진의 횟수 감소를 나타내는 (여진의) '''오모리 공식'''을 발표했다.

2. 2. 학문적 배경

오모리는 도쿄 제국대학에서 초빙된 영국의 외국인 고문들과 함께 물리학을 공부했다. 특히 존 밀른에게 지진학을 배웠으며, 1880년 도쿄 제국대학 최초의 지진학 교수가 된 세키야 세이케이를 포함한 일본인 동료들에게도 배웠다.[1]

1887년 제국대학 이과대학 (현 도쿄 대학 이학부)에 입학하여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1890년 졸업 후[40] 대학원에서 기상학과 지진학을 전공, 영국에서 초빙된 지진학자 존 밀른의 지도 아래 1891년 발생한 노비 지진의 여진을 연구했다. 1894년에는 여진의 횟수 감소를 나타내는 '''오모리 공식'''을 발표하기도 했다.

2. 3. 주요 경력

연도내용
1887년제국대학 이과대학 (현・도쿄 대학 이학부)에 입학, 물리학 전공.[39]
1890년제국대학 이과대학 물리학과 졸업,[40] 대학원에서 기상학지진학 전공. 영국에서 초빙된 지진학자 존 밀른의 지도 아래 1891년 노비 지진의 여진 연구.[40]
1891년세키야의 조수로 임명.[2]
1893년제국 대학 지진학 강사.[2]
1894년본진으로부터의 경과 시간에 따른 여진 횟수 감소를 나타내는 (여진의) 오모리 공식 발표. 이후 3년간 유럽 유학.
1896년유럽 유학에서 귀국 후, 제국대학 지진학 교수.[41] 노비 지진을 계기로 문부성(현・문부과학성) 내 진재 예방 조사회 간사.
1898년세계 최초의 연속 기록 가능 지진계인 오모리식 지진계 개발.
1899년초기 미동 지속 시간으로부터 진원까지의 거리를 결정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진원 거리의) 오모리 공식 발표.
1910년우수산 분화 시, 지진계를 소베츠정에 설치하여 화산성 지진 상세 관측.[42]
1911년분화 예지를 위한 화산 관측소 설치 제언.[42]
1914년1월 12일 사쿠라지마 다이쇼 대분화 발생, 1월 16일 해상에서 사쿠라지마 시찰 후 가고시마 시내 위험 없다는 견해 발표.[43]
1923년범태평양 학술 회의 참석차 오스트레일리아 출국 중 관동 대지진 발생, 귀국 후 뇌종양으로 사망.[44]


3. 오모리의 법칙

오모리의 법칙은 1891년 미노-오와리 지진의 초기 데이터 분석을 통해 여진 빈도가 본진 후 시간의 역수에 따라 감소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으로, 현재 "오모리의 법칙"이라는 수학 공식으로 표현된다.[3][8] 오모리는 존 밀른이 처음 설명한 지진 운동의 세 가지 주요 단계, 즉 예비 진동, 주 진동, 종말 진동을 측정했으며,[9][1] 주요 지진 후 현장을 방문하여 자신의 기기로 수집한 데이터를 확인했다.

3. 1. 오모리의 법칙 공식

여진의 빈도는 본진이 발생한 후 대략적으로 시간에 따라 점차적으로 줄어드는 모양새를 보인다. 이런 경험적인 관계식은 오모리 후사키치가 처음으로 공식화했으며 이를 '''오모리의 법칙''', 혹은 '''오모리 공식'''이라고 한다.[57] 오모리의 법칙은 아래와 같이 표현된다.

:n(t) = \frac {k} {(c+t)}

여기서 ''k''와 ''c''는 지진마다 서로 달라지는 상수이며 ''t''는 시간이다.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1961년 일본의 지진학자 우쓰 도쿠지가 수정한 오모리 법칙 공식 혹은 '''우쓰-오모리 법칙'''은 아래와 같다.[58][59]

:n(t) = \frac {k} {(c+t)^p}

여기서 ''p''는 여진감쇠율을 보정하는 또 다른 상수이며 일반적으로 0.7에서 1.5 사이의 값에 해당한다.

위의 방정식에 따르면 여진의 발생 비율은 시간이 지나면 빠르게 감소한다. 여진의 비율은 본진 발생 이후 시간에 반비례하며 이 관계를 통해 미래에 여진이 발생할 확률을 추정할 수 있다.[60] 따라서 본진이 일어난 당일에 여진이 일어날 확률이 어떻게 되든 그 다음 날의 확률은 전날 확률의 1/2이며, 10일 후의 확률은 첫 날 확률의 1/10에 해당한다.

3. 2. 법칙의 의의와 한계

여진의 빈도는 본진이 발생한 후 대략 시간에 따라 점차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경험적인 관계식은 오모리 후사키치가 처음으로 공식화했으며, 이를 '''오모리의 법칙''' 또는 '''오모리 공식'''이라고 한다.[57]

1961년 일본의 지진학자 우쓰 도쿠지가 수정한 오모리 법칙 공식은 '''우쓰-오모리 법칙'''으로 불리며,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58][59]

:n(t) = \frac {k} {(c+t)^p}

여기서 ''k'', ''c'', ''p''는 지진마다 달라지는 상수이며, ''t''는 시간이다. ''p''는 여진감쇠율을 보정하는 상수로, 일반적으로 0.7에서 1.5 사이의 값을 가진다.

이 방정식에 따르면 여진의 발생 비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빠르게 감소한다. 여진의 비율은 본진 발생 이후 시간에 반비례하며, 이 관계를 통해 미래에 여진이 발생할 확률을 추정할 수 있다.[60] 예를 들어, 본진 발생 당일에 여진이 일어날 확률이 어떻게 되든, 그 다음 날의 확률은 전날 확률의 1/2이며, 10일 후의 확률은 첫 날 확률의 1/10에 해당한다.

이러한 패턴은 여진의 통계적인 양상만을 표현한다. 여진의 실제 발생 시각, 횟수, 위치는 추계학적이며 대략적인 패턴만을 따른다. 오모리 법칙은 경험적인 법칙이므로, 각 상수값은 본진 발생 이후 수집한 데이터에 맞춰 보정되며, 어떠한 경우에도 특정 일반적인 물리적 법칙을 보이지 않는다.

우쓰-오모리 법칙은 여진 활동의 변화를 설명하는 미분방정식의 해를 구해 이론적으로도 얻을 수 있다. 이 미분방정식은 지진의 본진이 있었던 단층이 비활성화된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얻어졌다.[61] 또한, 이전의 우쓰-오모리 법칙은 지진 발생 당시 핵형성 과정에서도 얻어졌다.[62] 이러한 방정식을 해석하면 여진의 공간적, 시간적 분포가 공간에 의존하는 것과 시간에 의존하는 것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반응형 미분방정식의 유리수형 해를 풀어 구할 수도 있는데, 이중 거듭제곱 법칙 모델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여진 발생 빈도가 감소함을 보여주며, 그 중에는 우쓰-오모리 법칙과 같은 모습도 존재한다.[63]

3. 3. 이론적 배경

1961년 일본의 지진학자 우쓰 도쿠지가 수정한 오모리 법칙 공식(우쓰-오모리 공식)은 아래와 같다.[58][59]

: n(t) = \frac {k} {(c+t)^p}

여기서 ''p''는 여진감쇠율을 보정하는 상수이며 일반적으로 0.7에서 1.5 사이의 값이다.

위 방정식에 따르면 여진의 발생 비율은 시간이 지나면 빠르게 감소한다. 여진의 비율은 본진 발생 이후 시간에 반비례하며, 이 관계를 통해 미래에 여진이 발생할 확률을 추정할 수 있다.[60]

우쓰-오모리 법칙은 미분방정식의 해를 구해 이론적으로도 얻었는데, 이 미분방정식을 해석하면 지진의 본진이 있었던 단층이 비활성화된다는 발상에 기초해 얻어졌다.[61] 또한 이전의 우쓰-오모리 법칙은 지진 발생 당시 핵형성 과정에서도 얻어졌다.[62] 이런 방정식을 해석하면 여진의 공간적, 시간적 분포가 공간에 의존하는 것과 시간에 의존하는 것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음을 보여준다. 훨씬 최근에는 반응형 미분방정식의 유리수형 해를 풀어 구할 수도 있는데, 이중 거듭제곱 법칙 모델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여진 발생 빈도가 감소함을 보여주며 그 중에는 우쓰-오모리 법칙과 같은 모습도 존재한다.[63]

4. 오모리식 지진계

오모리식 지진계, 기상청 마쓰시로 지진 관측소 자료실 전시품


오모리 후사키치는 미노-오와리 지진 등의 관측을 통해 여진 빈도가 본진 후 시간의 역수에 의해 감소한다는 "오모리의 법칙"을 발견했다.[3][8]

오모리는 존 밀른과 함께 지진 운동의 세 가지 주요 단계(예비 진동, 주 진동, 종말 진동)를 측정했고,[9][1] 1906년 메이산 지진 직후 일본령 포르모사(대만)에서 토양 액상화 현상과 건물 붕괴를 묘사하며, 햇볕에 말린 벽돌 벽과 무거운 지붕을 가진 건축 구조가 피해를 키웠다고 지적했다.[10]

또한, 오모리는 지진 공학 분야에서 진동대를 사용해 인공 구조물에 대한 지진의 영향을 연구하고, 실험 결과를 실제 지진 측정값과 비교한 최초의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14][1]

4. 1. 개발 배경 및 원리

도쿄 제국대학 교수였던 오모리는 존 밀른 등에게서 지진학을 배웠다.[1] 1891년 미노-오와리 지진을 계기로 여진 빈도가 본진 후 시간의 역수에 따라 감소한다는 "오모리의 법칙"을 발견했다.[3][8]

1890년대부터 1900년대 초, 각지의 측후소에는 G.M.E(그레이 - 밀른・유잉) 보통 지진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지진계는 감진기가 작동해야 기록을 시작했기 때문에 P파를 기록할 수 없었다.[48]

오모리는 G.M.E 보통 지진계를 개량하여 1898년경 상시 기록 가능한 오모리식 (수평) 지진계를 제작했다.[48] 이 지진계는 잉크 기록 방식으로, 기록지를 원통형으로 감은 드럼을 태엽으로 천천히 움직여 항상 기록하는 방식이었다.[49] 이를 통해 P파, S파, L파(표면파)의 차이를 뚜렷하게 구분하여 기록할 수 있었다.[48][50]

1899년, 오모리는 수평 기록 진자를 설명했는데, 이것이 오모리 지진계[3]가 되었다. 스트라스부르의 J&A 보쉬 회사에서 약간 수정하여 "보쉬-오모리 지진계"가 되었고,[4] 전 세계에 배포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세계 지진 네트워크의 주축을 이루었다.[5] 이후 미동계, 간이 미동계 등 다양한 개량형이 만들어져 일본 국내외에서 사용되었다.[51]

4. 2. 보쉬-오모리 지진계

1899년, 오모리는 수평 기록 진자를 설명했는데, 이는 이후 오모리 지진계[3]로 불렸다. 스트라스부르의 J&A 보쉬 회사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보쉬-오모리 지진계"가 되었다.[4] 보쉬-오모리 지진계는 전 세계에 배포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세계 지진 네트워크의 주축을 이루었다.[5] 현재 지진 네트워크와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마지막 보쉬-오모리 지진계는 캘리포니아주 페르ndale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6]

1890년대부터 1900년대 초에 걸쳐 각지의 측후소에 설치되었던 지진계는 G.M.E(그레이 - 밀른・유잉) 보통 지진계로, 감진기가 작동하면서 기록을 시작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P파를 기록할 수 없는 결함이 있었다. 오모리 후사키치는 GME 보통 지진계를 개량하여 1898년경에 상시 기록 가능한 오모리식 (수평) 지진계를 제작했다.[48] 이 지진계는 잉크 기록 방식으로 기록지를 원통형으로 감은 드럼을 태엽으로 천천히 움직여 항상 기록하는 방식이었다.[49] 따라서 P파, S파, L파의 차이를 뚜렷하게 구분하여 기록하는 것이 가능했다.[48][50]

이후 미동계, 간이 미동계 등 다양한 개량형이 만들어져 일본 국내(대학・기상대 측후소)뿐만 아니라 일본 국외에서도 사용되었다.[51]

4. 3. 현대적 의의

1899년, 오모리는 수평 기록 진자를 설명했는데, 이는 이후 오모리 지진계[3]로 불렸다. 스트라스부르의 J&A 보쉬 회사에서 약간 수정한 "보쉬-오모리 지진계"는[4] 전 세계에 배포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세계 지진 네트워크의 주축을 이루었다.[5] 현재 지진 네트워크와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마지막 보쉬-오모리 지진계는 캘리포니아주 페르ndale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6]

1890년대부터 1900년대 초에 걸쳐 각지의 측후소에 설치되었던 G.M.E(그레이 - 밀른・유잉) 보통 지진계는 감진기가 작동하면서 기록을 시작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P파를 기록할 수 없는 결함이 있었다. 오모리 후사키치는 GME 보통 지진계를 개량하여 1898년경에 상시 기록 가능한 오모리식 (수평) 지진계를 제작했다.[48] 이 지진계는 잉크 기록 방식으로, 기록지를 원통형으로 감은 드럼을 태엽으로 천천히 움직여 항상 기록하는 방식이었다.[49] 따라서 P파, S파, L파의 차이를 뚜렷하게 구분하여 기록하는 것이 가능했다.[48] [50] 이후 미동계, 간이 미동계 등 다양한 개량형이 만들어져 일본 국내(대학・기상대 측후소)뿐만 아니라 일본 국외에서도 사용되었다.[51]

5. 지진 및 화산 연구

오모리는 도쿄 제국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존 밀른과 세키야 세이케이에게서 지진학을 배웠다.[1] 1893년 아즈마산 분화를 시작으로 일본의 화산을 연구했다. 아사마산, 1910년 우수산 분화, 1914년 사쿠라지마 분화 등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여러 종류의 화산 지진을 설명했다.

특히 1910년 우수산 분화 때에는 소베츠정에 지진계를 설치하여 화산성 지진을 상세히 관측하고, 세계 최초로 화산성 미동을 기록했으며, 분화 예지를 위한 화산 관측소 설치를 제언했다.[42] 1914년 사쿠라지마 대분화 때는 지진 발생 보고를 받고 주민들에게 경고하여 인명 피해를 줄이는 데 기여했다.[43] 또한, 가고시마 시내에는 위험이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발표하여 혼란을 진정시켰다.[44]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의 토마스 재거와 함께 하와이 빅아일랜드에 화산 관측소를 세울 계획을 세웠다. 오모리는 휘트니 지진 연구소의 기초와 지진계 설치를 설계했으며, 1912년 하와이에 오모리형 수평 트로모미터와 지진계 두 대를 설치했다.[32] 1년 후, 보쉬-오모리 지진계 두 대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서 하와이 화산 관측소(HVO)에 기증되었다.[33]

5. 1. 지진 연구

1890년제국대학 이과대학(현 도쿄 대학 이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40] 대학원에서 기상학지진학을 전공하여 영국에서 초빙된 지진학자 존 밀른의 지도 아래 1891년에 발생한 노비 지진의 여진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세키야와 오모리는 대학의 측정 장치를 통해 파괴적인 지진에 대한 최초의 명확한 기록을 발표했다.[1]

1891년 노비 지진은 초기 데이터 세트를 제공했으며, 다른 지진과 상관관계 분석을 통해[1] 여진 빈도가 본진 후 시간의 역수에 의해 감소한다는 것을 밝혀냈고, 이는 현재 "오모리 공식"이라고 불리는 수학 공식이다.[3][8] 1894년에는 본진으로부터의 경과 시간에 따른 여진의 횟수 감소를 나타내는 (여진의) '''오모리 공식'''도 발표했다.

오모리는 밀른이 처음 설명한 지진 운동의 세 가지 주요 단계를 측정했는데,[9] 바로 예비 진동, 주 진동 및 종말 진동이었다.[1] 그는 주요 지진 후 지역을 방문하여 그의 기기로 수집한 데이터를 현장에서 확인했다.

1899년에 초기 미동 지속 시간으로부터 진원까지의 거리를 결정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진원 거리의) 오모리 공식을 발표했다.

1906년 3월 17일 메이산 지진 직후 일본령 포르모사(대만)에 도착하여 토양 액상화와 메이산 마을의 완전한 파괴를 묘사했다. 그는 높은 사망자 수를 지배적인 지역 건축 형태의 구조 붕괴 때문이라고 설명했는데, 이는 진흙으로 느슨하게 접착된 햇볕에 말린 벽돌 벽과 무거운 지붕 들보로 덮여 있었다.[10]

1889년 오모리는 존 밀른과 함께 도쿄대학교 공과대학에서 수평적으로 가해지는 운동에 의한 벽돌 및 기타 기둥의 전복 및 파괴를 조사하기 위한 실험을 기록했다. 수년간 메이지 유신 시대 동안 일본의 근대화는 전통적인 가벼운 나무 구조물을 바위 위에 놓고 붉은 벽돌 건물과 철교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밀른에게 주요 관심사였다.[11][12][13]

오모리는 이후 이 연구를 계속 진행했으며, 지진 공학 분야에서 진동대를 사용하여 인공 구조물에 대한 지진의 영향을 연구하고, 실험 결과를 실제 지진 중의 측정값과 비교한 최초의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14][1]

1908년 메시나 지진에서 오모리는 약 75,000명에 달하는 많은 인명 피해를 언급하며, 그중 99%가 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집을 짓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했다고 말했다.[1]

당시 전 세계적으로 가장 흔했던 두 종류의 지진계인 밀른식 지진계와 보쉬-오모리식 지진계는 샌프란시스코 지진을 기록했다.[15] 오모리는 5월 1일 배를 타고 도쿄를 출발하여 5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나카무라 타츠타로 교수와 사노 토시카타("리키") 교수를 포함한 제국 건축가 및 기술자 위원회를 이끌고 샌프란시스코 지진의 여파를 연구하고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새로운 지진계를 기증하기 위해서였다.[17]

캘리포니아에서 약 80일 동안[17] 오모리는 험볼트 카운티 북쪽으로 증기선을 타고 여행했으며, 유레카에서 비노조합 파업 파괴 선원으로 오인한 불량배에게 공격을 받았다.[25] 유레카 시장은 즉시 오모리 박사에게 사과했다.[26]

오모리는 관찰을 계속하여 일 강 계곡 남쪽으로 이동하여 페어데일에 들렀으며, 센터빌 남쪽의 폴스 케이프에서 거대한 산사태가 발생하여 이전 해안 도로를 덮고 태평양으로 새로운 을 만들었으며, 지역 재산과 건물에도 피해를 입혔다고 기록했다. 페어데일을 떠난 오모리는 샌 안드레아스 단층의 흔적을 따라 육로로 샌프란시스코로 가면서 인공물과 자연물의 신중한 목록을 계속 작성했다.[27] 그 과정에서 그는 지진에 대한 지면, 건물 및 나무의 반응을 관찰했으며, "거대한 키 큰 나무조차도 지면의 전단 운동으로 갈라졌다"고 언급했다.[17]

이후 오모리는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 및 미국 해안 및 측지 측량국과 함께 페어데일에 보쉬-오모리 지진계 설치를 지원하는 페어데일 지진 관측소를 설립했다. 이 지역은 해상 멘도시노 삼중 접합과의 근접성으로 특히 흥미롭다. 그 지진계는 계속 작동하며(현재는 독립적으로) 페어데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28][6]

오모리는 직접, 그리고 그의 저술에서 단층의 육안 흔적을 따라 포인트 아레나에서 산호세까지 150마일 남쪽으로 갔지만, 그 선이 유레카 남쪽의 폴스 케이프 산사태까지 120마일 북쪽 해저로 계속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이 여행에서 오모리가 찍은 사진 중 다수가 출판되었다.[17]

오모리는 샌프란시스코 남쪽의 묘비와 산호세의 세인트 제임스 호텔을 포함한 건물의 벽에 있는 균열을 연구하여 움직임의 방향을 연구했다.[16] 서양식 건물과 일본식 건물의 피해를 연관시켜 오모리는 관측된 영향뿐만 아니라 계측기 판독 값을 사용하여 피해를 설명하는 최초의 지진 피해 척도를 발표했다. 오모리는 캘리포니아의 단층 현상을 파괴 평면의 전단 응력에 의해 단층의 방향과 평행하게 발생한다고 설명했다.[16] 오모리 지진계는 캘리포니아 북부 전역에 신속하게 설치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 지진의 여진 목록이 편집되어 출판되었다.[16] 오모리는 1906년 8월 4일 ''도릭''호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29]

5. 2. 화산 연구

오모리 후사키치는 도쿄 제국대학에서 존 밀른 등 외국인 고문들과 함께 물리학을 공부했으며, 1895년 일본을 떠날 때까지 밀른과 세키야 세이케이 등에게서 지진학을 배웠다.[1] 1891년 미노-오와리 지진의 여진 빈도가 본진 후 시간의 역수에 의해 감소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는데, 이는 현재 "오모리의 법칙"으로 불린다.[3][8]

오모리는 지진 운동의 세 가지 주요 단계(예비 진동, 주 진동, 종말 진동)를 측정했으며,[9][1] 1906년 메이산 지진 직후 일본령 포르모사(대만)에서 토양 액상화와 메이산 마을의 파괴를 관찰하고, 높은 사망자 수가 진흙으로 접착된 햇볕에 말린 벽돌 벽과 무거운 지붕으로 된 지역 건축 형태의 구조 붕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10]

1889년, 오모리는 존 밀른과 함께 벽돌 및 기타 기둥의 전복 및 파괴를 조사하는 실험을 기록했다. 메이지 유신 시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적인 가벼운 나무 구조물 대신 붉은 벽돌 건물과 철교가 건설되었는데, 이는 밀른의 주요 관심사였다.[11][12][13] 오모리는 이후 이 연구를 계속하여 지진 공학 분야에서 진동대를 사용해 인공 구조물에 대한 지진의 영향을 연구하고, 실험 결과를 실제 지진 중의 측정값과 비교한 최초의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14][1] 1908년 메시나 지진에서 그는 약 75,000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의 99%가 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집을 짓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언급했다.[1]

오모리는 1893년 아즈마산 분화를 기술한 초기 논문부터 일본의 화산을 연구했다. 그는 아사마산의 정기적인 분화, 1910년 우수산 분화, 1914년 1월 12일 사쿠라지마 분화에서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여러 유형의 화산 지진을 설명했다. 특히 1910년 우수산 분화 때에는 소베츠정에 지진계를 설치하여 화산성 지진의 상세한 관측을 수행, 화산성 미동을 세계 최초로 기록하고, 분화 예지를 위한 화산 관측소 설치를 제언했다.[42] 1914년 사쿠라지마 대분화 당시에는 전날부터 사쿠라지마 주변에서 작은 지진이 다발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주민들에게 경고하여 더 큰 인명 피해를 막았다.[43] 1월 16일에는 해상에서 사쿠라지마를 시찰하고 가고시마 시내에는 위험이 미치지 않는다는 견해를 발표하여 혼란 상태에 있던 시내를 평정시켰다.[44]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의 토마스 재거를 만나 하와이 빅아일랜드에 화산 관측소를 세울 계획을 세운 후, 오모리는 휘트니 지진 연구소의 기초와 지진계 설치를 설계했다. 1912년 오모리는 하와이에 오모리형 수평 트로모미터와 지진계 두 대를 설치했고,[32] 1년 후 보쉬-오모리 지진계 두 대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서 HVO에 기증되었다.[33]

6. 진재 예방 활동

오모리 후사키치는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 직후, 전 세계 지진학자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북부에 도착했다.[16] 그는 제국 건축가 및 기술자 위원회를 이끌고 샌프란시스코 지진의 여파를 연구하고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새로운 지진계를 기증했다.[17]

오모리와 동료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손상된 건물을 측정하고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공격을 받기도 했다.[19] 일부에서는 반일 인종차별적인 공격이라고 주장했지만,[20][21] 오모리 본인은 "모든 나라에 불량배가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나를 매우 잘 대했고, 나는 여행에 매우 만족했습니다."라며 용서하는 태도를 보였다.[24]

캘리포니아에서 약 80일 동안[17] 오모리는 험볼트 카운티 북쪽으로 이동하며 관찰을 계속했고, 샌 안드레아스 단층을 따라 이동하며 인공물과 자연물의 목록을 작성했다.[27] 그는 지진에 대한 지면, 건물, 나무의 반응을 관찰했으며, "거대한 키 큰 나무조차도 지면의 전단 운동으로 갈라졌다"고 기록했다.[17]

이후 오모리는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 등과 함께 페어데일에 지진 관측소를 설립하고 보쉬-오모리 지진계 설치를 지원했다.[28][6] 그는 단층의 육안 흔적을 따라 포인트 아레나에서 산호세까지 이동하며 연구를 진행했고, 이 과정에서 찍은 사진 중 다수가 출판되었다.[17]

오모리는 묘비와 건물의 벽에 있는 균열을 연구하여 움직임의 방향을 연구하고, 서양식 건물과 일본식 건물의 피해를 연관시켜 최초의 지진 피해 척도를 발표했다.[16] 그는 캘리포니아의 단층 현상을 파괴 평면의 전단 응력에 의해 발생한다고 설명했고,[16] 그의 지진계는 캘리포니아 북부 전역에 설치되어 샌프란시스코 지진의 여진 목록 작성에 기여했다.[16]

6. 1. 진재 예방 조사회 활동

오모리는 1891년 세키야 세이케이의 조수로 임명되었고, 1893년에는 제국 대학의 지진학 강사가 되었다.[2] 1896년 1월 9일 세키야가 사망한 후에는 지진학 교수가 되었고, 제국 지진 조사 위원회의 서기가 되었다.[3] 세키야와 오모리는 대학의 측정 장치를 통해 파괴적인 지진에 대한 최초의 명확한 기록을 발표했다.[1]

6. 2. 지진 위험 경고

1905년 같은 도쿄 대학 강좌 조교였던 이마무라 아키쓰네는 향후 50년 안에 도쿄에 대지진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대책을 촉구하는 기사를 잡지 『태양』에 기고했다. 이 기사는 신문에 선정적으로 보도되어 사회 문제가 되었다. 오모리 후사키치는 지진 대책의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사회에 혼란을 일으키는 것을 우려하여 이 기사를 근거 없는 주장으로 일축하는 입장을 취했다.[41]

1914년 1월 12일 아침, 전날부터 사쿠라지마 주변에서 작은 지진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보고를 받고 주의를 촉구하는 전보를 보내려던 찰나에 사쿠라지마 대분화가 발생했다.[43] 1월 16일에는 해상에서 사쿠라지마를 시찰하고, 같은 날 19시에 가고시마시에는 위험이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발표하여 당시 혼란 상태였던 시내를 안정시켰다.[43]

그러나 이러한 오모리 후사키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고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1923년 관동 대지진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졌고, 이는 그의 예측이 안타깝게도 현실화되었음을 보여준다.

6. 3. 관동 대지진과 오모리 후사키치

1923년 오모리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린 제2회 범태평양 과학 회의에 참석하여, 에드워드 피고트와 함께 호주 시드니 리버뷰 칼리지의 천문대에서 관측기를 통해 간토 대지진을 관측했다.[39] 이 지진은 요코하마와 도쿄를 파괴하고 약 14만 명의 사망자와 190만 명의 이재민을 발생시켰다.

1923년 10월 4일, 오모리는 ''텐요 마루''를 타고 호주 멜버른에서 일본으로 돌아왔으나,[44] 귀국 직후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사망 며칠 전 황실로부터 서보장을 수여받은 후,[44] 1923년 11월 8일 도쿄 대학 병원에서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9] 묘소는 다마 영원에 있다.

오모리는 1905년이마무라 아키쓰네가 도쿄에서 대지진이 발생할 것을 경고하고 대책을 촉구하는 기사를 썼을 때, 지진 대책의 필요성에는 공감했지만 사회 혼란을 우려하여 이마무라의 주장을 근거 없는 설로 일축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1914년 사쿠라지마 대분화 당시에는, 분화 전 작은 지진이 다발하는 것을 보고받고 주의를 촉구하는 전보를 치려던 찰나에 분화가 발생했다.[43] 이후 해상에서 사쿠라지마를 시찰하고, 가고시마시에는 위험이 없다는 견해를 발표하여 혼란을 진정시키기도 했다.[43]

7. 유산 및 평가

오모리 후사키치는 "일본 지진학의 아버지"로 불리며,[41] 1896년 유럽 유학에서 귀국한 후 제국대학 지진학 교수가 되어 일본 지진학을 이끌었고, 문부성 내 진재 예방 조사회의 간사를 오랫동안 맡았다.[41]

1898년 세계 최초의 연속 기록 가능한 지진계인 오모리식 지진계를 개발했고,[41] 1899년에는 초기 미동 지속 시간으로부터 진원까지의 거리를 결정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오모리 공식을 발표했다.[41] 1894년에는 본진으로부터의 경과 시간에 따른 여진 횟수 감소를 나타내는 (여진의) '''오모리 공식'''도 발표했다.

그의 탄생지인 후쿠이현 후쿠이시 테요 2초메의 테요 공원에는 오모리 후사키치의 동상과 오모리식 지진계를 나타낸 부조가 세워져 있다.

오모리는 생전에 다음과 같은 위계와 훈장을 받았다.



훈장
1915년 11월 10일 - 대례 기념장[47]


7. 1. 과학적 유산

오모리 후사키치는 도쿄 제국대학에서 존 밀른과 세키야 세이케이 등에게 물리학을 배웠다.[1] 세키야와 오모리는 대학의 측정 장치를 통해 파괴적인 지진에 대한 최초의 명확한 기록을 발표했다.[1] 1896년 세키야가 사망한 후, 오모리는 지진학 교수가 되었고 제국 지진 조사 위원회의 서기가 되었다.[3]

오모리는 1899년 수평 기록 진자를 설명했는데, 이는 이후 오모리 지진계로 불렸다.[3] 독일의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J&A 보쉬 회사에서 이 진자를 개량하여 "보쉬-오모리 지진계"를 만들었다.[4] 보쉬-오모리 지진계는 전 세계에 배포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세계 지진 네트워크의 주축을 이루었다.[5]

1890년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 각지의 측후소에 설치되었던 G.M.E(그레이 - 밀른・유잉) 보통 지진계는 P파를 기록할 수 없는 결함이 있었다. 오모리는 이를 개량하여 1898년경에 상시 기록 가능한 오모리식 (수평) 지진계를 제작했다.[48] 이 지진계는 잉크 기록 방식으로, P파, S파, L파의 차이를 뚜렷하게 구분하여 기록하는 것이 가능했다.[48][50] 이후 미동계, 간이 미동계 등 다양한 개량형이 만들어져 일본 국내외에서 사용되었다.[51]

7. 2. 사회적 기여

오모리 후사키치는 일본 지진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지진 예방 및 지진 공학 분야에 헌신했다.

1891년 미노-오와리 지진의 단층선을 추적하고, 여진 빈도가 본진 후 시간에 반비례하여 감소한다는 "오모리 공식"을 발표하여 지진 예측 연구의 기반을 마련했다.[3][8] 지진 운동의 세 단계를 측정하고,[1] 1906년 메이산 지진 직후 일본령 포르모사(대만)에서 토양 액상화 현상을 관찰하여 건물 붕괴와 인명 피해 원인을 분석하는 등[10] 지진 피해를 줄이기 위한 연구에 힘썼다.

1908년 메시나 지진에서는 75,000여 명의 사망 원인이 내진 설계 부족에 있다고 지적하며[1] 건축물의 내진 설계 중요성을 강조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 직후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여 피해 상황을 조사하고,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새로운 지진계를 기증하는 등[17] 국제적인 지진 연구 협력에도 기여했다.

존 밀른과 함께 건물의 내진 설계를 위한 실험을 진행하고,[11] 진동대를 사용하여 인공 구조물에 대한 지진의 영향을 연구하는 등[14] 지진 공학 분야의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연구는 메이지 유신 시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적인 목조 건물 대신 벽돌 건물과 철교가 도입되면서 더욱 중요해졌다.[11][12][13]

진재 예방 조사회 간사로서 지진 대책 필요성을 강조하고, 1914년 사쿠라지마 대분화 당시 가고시마 시민들에게 위험이 없음을 알리는 등[43] 시민 안전을 위한 활동도 펼쳤다. 1910년 우수산 분화 때에는 화산성 지진을 관측하고, 화산 관측소 설치를 제안하는 등[42] 화산 활동 연구에도 기여했다.

이처럼 오모리 후사키치는 지진 및 화산 활동 연구, 지진 피해 예방, 지진 공학 발전에 헌신하며 일본 사회에 큰 공헌을 남겼다.

7. 3. 후대의 평가

오모리 후사키치는 "일본 지진학의 아버지"로 불린다.[41] 그는 1896년 유럽 유학에서 귀국한 후, 제국대학 지진학 교수가 되어 일본 지진학을 이끌었으며, 문부성 내 진재 예방 조사회의 간사를 오랫동안 맡았다.[41]

오모리 후사키치는 1898년 세계 최초의 연속 기록 가능한 지진계인 오모리식 지진계를 개발했고,[41] 1899년에는 초기 미동 지속 시간으로부터 진원까지의 거리를 결정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오모리 공식을 발표했다.[41] 1894년에는 본진으로부터의 경과 시간에 따른 여진 횟수 감소를 나타내는 (여진의) '''오모리 공식'''도 발표했다.

그의 탄생지인 후쿠이현 후쿠이시 테요 2초메의 테요 공원에는 오모리 후사키치의 동상과 오모리식 지진계를 나타낸 부조가 세워져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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